올해 메이드 인 부산 경쟁 부문에는 총 72편(단편 67편, 장편 5편)의 작품이 출품되었습니다. 숫자만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순 없지만, 단편의 경우 지난해 61편에 비해 11편이 늘었고 장편 제작 편수도 2편에서 5편으로 증가하여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하는 부산 지역 영화의 현실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16편을 선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열정으로 빚어낸 결과란 걸 알기에 한 편 한 편 신중하게 심사했습니다.
누구나 영상 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영화는 과연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심사위원들은 그에 관한 답을 영화 내부에 지닌 작품을 선정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연출자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면서 완성도 면에서 안정적인 작품들이 주목받았습니다. 극영화의 경우 서사를 쉽게 봉합하거나 갈등을 부각하려 주변 인물을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등의 아쉬운 점이 자주 눈에 띈 반면,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에서는 창작자의 독창적인 시각과 문제의식이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단편영화가 가진 시간적 제약이 부족한 마무리로 이어진 작품들에 다소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일자리 부족과 청년층의 이탈로 인한 인구 감소, 난개발로 몸살을 앓는 부산 지역이 직면한 현실을 주제로 다양한 말걸기를 시도한 점은 눈에 띄지만, 다큐멘터리가 갖춰야 할 시선의 깊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심사 과정에서 만장일치로 선정된 작품들은 그 완성도와 독창성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들의 다음 행보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당락을 떠나 모든 작품이 겪었을 도전과 완성의 과정이 창작자 개인에게는 다음을 향해 가는 힘이 되고, 그 힘은 부산독립영화의 귀중한 자산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심사위원이라는 위치에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영화의 안팎에서 마주했을 고민의 시간을 발견할 때마다 동료이자 관객으로서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모든 출품작과 출품에 참여한 부산 지역 창작자 여러분의 성장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내년 메이드 인 부산에서 더 풍성하고 사려깊은 작품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
삶은 영화와 분리될 수 있을까? 극장과 그 바깥, 카메라의 앞과 뒤처럼 경계 구분이 가능한 일인지. 이 영화들을 두고 든 생각이다. ‘스펙트럼 부산’은 부산독립영화의 생동하는 지금(스펙트럼 부산-나우)과 되감은 과거(스펙트럼 부산-리와인드)를 펼쳐내 부산독립영화의 너른 스펙트럼을 조망하는 장소다.
레지던시, 그리고 영화
뜨거웠던 올여름, 부산 인터시티 레지던시 영화제작사업의 일환인 ‘레지던시 인 부산’ 프로젝트에서 부산을 배경으로 네 편의 단편영화가 제작되었다. 그중 세 편을 소개한다. 부산. 손녀는 영화를 제작하려 방문했지만 그의 할아버지에겐 한국전쟁 참전으로 처음 도착한 곳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역사를 숟가락 하나로부터 생각하는 <할아버지가 떠난 뒤>(2024, 에브루 아브치)에서와 달리 어떤 이들에게 유엔기념공원은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다. <빛과 열: 부산시 남구 유엔평화로>(2024, 오승진)의 만화가 남정훈도 그렇다.
<바다의 자매>(2024, 자이메나 자렝바)는 삶의 전사(戰士) 영도 해녀들이 거친 바다에 맞서 보무당당한 삶을 꾸려가는 다큐멘터리다. 회복한 신나리는 잠시 내려둔 카메라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좋은 공기를 마시고 영화도 찍는다. <미조>(2024)의 내화면에 종종 들어오는 그와 그의 미더운 동료들은 물론, 내레이션이 주는 결연한 힘마저 반갑다. 2022년 부산 인터시티 레지던시 영화제작사업에서 지원한 <봄 이야기>는 <구름이하는말>(2024)로 돌아왔다. 장태구는 산란하는 빛처럼 아름다운 청춘과 도시의 풍경을 영화에 가두었다.
안부를 전하며
오래간만에 연출자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있다. 정성욱은 김백준과 공동연출한 <내 마음에 불꽃이 있어>(2008) 이후 유수의 작품들에 참여했다. 그의 첫 단독 장편은 <수영제과>(2024)로, 동화처럼 귀엽고 아기자기한 트렌디 드라마의 세계를 그린다. 손승웅은 단편에서부터 장르에 일관한 그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린다. 선 굵은 누아르 <천국>(2024)은 <영도>(2015) 이후 두 번째 장편이다. 이하람은 데뷔한 이래 해마다 작품을 발표하며 이제 세 번째 장편영화를 가졌다. 『제5 도살장』의 문장을 연상케 하는 <뭐 그런 거지>(2024)는, 몇몇 소설을 비롯해 SF, 서부극, 누아르, 로드무비 등 온갖 장르가 어지러이 섞여 기시감을 제공하며 그의 세계를 공고히 한다.
오민욱도 성실한 기록자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한 단절 이전과 이후, 그리고 오지 않은 시간이 <산산조각 난 해>(2024)에 담겼다. 영화는 지극히 사적이고 파편적인 질료들을 이용해 재현을 타진하고 있다. 영화배우로 더 친숙한 이한주는 장편 데뷔작 <파동>(2024)으로 부산독립영화제를 찾았다. 차가운 계절의 질감, 배우 박가영의 얼굴 아래 잠긴 슬픔과 고독, 모호한 서사로 된 영화에게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괴테의 말을 건네고 싶다. <봄바람 프로젝트 시즌2 : 다시, 바람이 분다>(2024)는 액티비스트의 영화다. 그들이 영화를 삶과 분리할 수 있을까? 김환태 외 13인의 창작자들 중 문창현과 권혜린의 카메라는 각각 밀양 송전탑과 가덕도 신공항에 반대하는 이들을 좇는다. 옳다고 믿는 바를 향해 가는 사람들의 빛나는 얼굴과 힘 있는 목소리를 보고 들으며 영화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꾸는 건, 사람이다.
기억하는 마음
스펙트럼 부산-리와인드는 2월에 세상을 떠난 유상곤의 단편 대표작들을 스크린에 올린다. 그는 1990년대의 한국독립영화가 부산을 주목하게 만든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이미지로 된 비서사의 시간 안에 새겨넣은 미니멀리즘 지향적인 영화 감각과 생의 논리는 오늘날 창작자와 관객에게 작용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의 길고 건조한 응시 너머에 끝내 숨겨지지 않는 온기를 생각하며 상영에 이를 수 있도록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내준 유가족과 동료 여러분께 깊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벽은 도시 곳곳에 버티고 서 있다. 그것은 사람을 압도하고 나무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이로 허공을 향해 위태롭게 자란다. 자기 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내며 우리 삶을 평범하게 죄어오는 벽. 강유가람의 카메라는 그 벽이 가진 불확실함을 향한다.
모래가 흩날리는 대지 위에 벽을 세운다. 저편에서 들려오는 이 세계의 소식은 그 벽을 스치지만, 벽 아래를 기어 다니는 개미의 소리없는 발자국처럼 카메라를 통과하며 잦아들 뿐이다. 강유가람의 첫 다큐멘터리 <모래>(2011)는 그 벽의 불확실함이 하나의 자국처럼, 어떤 이의 욕망이 남긴 부스러기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담담한 어조로 들려준다. 강유가람은 두 번째 작품이자 첫 극영화 <진주머리방>(2015)에서도 저마다의 변화 앞에 선 인물들을 통해, 밀려들고 나는 것들이 만나 발생시키는 불확실함과 함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지켜본다. 그의 카메라는 벽이 단순히 시야를 차단하고 공간을 분리하는 기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게재하는 장소임을 숨기지 않고 담는다. 진주머리방의 유리벽을 닦는 행위는 이 벽이 한없이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오염과 자국들로 불투명한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데, 이는 <모래>에서 벽에 남아 있던 자국을 비추던 카메라와 닮았다.
강유가람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벽은 말과 행동으로 규정되지 않는 불확실한 존재가 되어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벽을 향하던 카메라는 두 번째 다큐멘터리 <이태원>(2016)에서 우리의 삶과 역사에서 비롯되는 불확실함을 기록한다. 서울 도심의 기지촌 이태원을 가두는 것은 미국이 세워둔 높고 긴 벽이다. 벽 너머 전쟁의 역사는 벽 아래의 불확실한 삶들과 무관하지 않다. 용산을 등지고 기지촌 골목의 벽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인물들은 낙인이 된 벽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다. 벽에 붙은 표식들은 도시의 불확실함에 맞서거나 그로 인해 무너져버린 이후의 흔적이다. 지금 이태원 골목에는 새로운 벽들이 자란다. 강유가람은 솟아오르는 벽을 바라보며, 세 편의 다큐멘터리, <시국페미>(2017), <우리는 매일매일>(2019), <에프터 미투>(2021)를 발표한다. 세 작품을 통해 그는 여성주의에 대한 경험과 인식, 활동과 실천을 그 벽에 새긴다. 여성주의에 대한 논쟁의 주체는 늘 총체적 형상으로 존재했다. 불투명한 벽에 붙은 메시지는 언제든 떼어낼 수 있는 불확실함을 지니곤 했다. 간추릴 수 없는 생각과 말이 남긴 자국들이 뒤섞일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 여성주의는 벽이 허물어진 광장이었다. 그러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죄의식을 잃어버린 이들이 추종했던 탄압과 폭력은 광장에 언제든 다시 거대한 벽이 세워질 수 있다는 그 벽의 불확실함이 난립하는 풍경이기도 했다. 여성주의자들의 광장은 편견의 격랑 앞에서도 한 발 한 발 내딛는 이들의 실천을 통해 지속되었고, 불확실한 그 공백을 보편과 대안의 이름으로 채워갔다. 그의 카메라도 이 광장의 일부가 되었다.
오랜 시간 솟아오르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해 왔던 벽은 강유가람으로 하여금 그 벽의 불확실함이 비가시적인 영역에서 이 도시와 관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물음을 피워냈다. 그의 일곱 번째 작품이자, 두 번째 극영화 <럭키아파트>(2024)는 서로의 벽을 딛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균열을 후각으로 전경화한다. 편견과 혐오로 부패하는 도시의 그 벽 아래에도 <모래>에서 보았던 개미들의 소리 없는 발자국이 남아 있을까? 카메라는 그 벽 아래를 망설임 없이 비춰보지만, 보이지 않는 냄새만이 진동할 뿐이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사멸한 개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 앞에는 매끈한 벽이 버티고 서 있다. 우리는 매일 그 벽을 보고, 매일 그 벽에 대해 말한다. 도시의 그 벽은 여전히 불확실하기만 하다.
영화 매체에서 지역의 장소성이란 완연한 재현이 불가능한 상상적이고 익명적인 영역으로밖에 그려질 수밖에 없다. 적어도 올해 부산독립영화제 로컬투로컬 섹션에서 상영되는 6편의 영화에서 지역적 장소성과 시간성, 그곳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그것으로의 완전한 접근이 불가능한 절대 영역으로 상정된다. 혹은 그곳의 역사를 복원하려 시도하더라도 그것이 순전한 영화적 방식, 요컨대 스크린 위의 시청각적 재현만으론 불가하단 한계를 의도한다. 다만 이 한계는 대개 아름답다. 어쩔 수 없는 일에 어쩔 수 없다고 고민하며 각자의 다른 길을 찾는, 그리고 찾아 나가고 있는 이들의 용기를 지지한다.
<나선의 연대기>(2023, 김이소)는 2006년 정부가 농민들을 과잉 진압한 평택 대추리 사건을 AI 이미지로 복원하려 시도한다. 다만 그 이미지의 품질 불완전성은 모종의 감각적 불쾌함을 자아내는데, 그 불쾌함은 우리가 특정 시공간의 역사에 대해 언제나 지각생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절감하는 데에서 나온다. 불가피하게 재현 매체라는 틀에 얽매인 영화는 역사적 사건에 무한히 근접하거나 그것을 모사할 뿐이지 그 사건이 될 순 없다. 이에 영화는 그 사건의 정체를 극 중 인물들이 간접적으로 ‘듣는 것’ 혹은 ‘보는 것’으로 솔직하게 수용하고, 그로부터 거꾸로 우리가 ‘만들어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나선의 형태로 꼬리 물며 질문한다.
<열 개의 우물>도 공교롭게 대추리 사건을 말하고 그 방식은 가무다. 1980년대 인천 빈민가에서 여성 교육 운동을 펼쳤던 할머니의 앞에서 남자가 춤추며 노래한다. <신사 아파트>라는 노래의 가사는 “신사 아파트 투기 대출이자 대출이자 (중략) 대추리 대추리 농민들 죽이네 (중략) 이 농협 개새끼들”이다. 비극을 희화화된 곡조로 변주한 음악이 없다면 회상적 다큐멘터리의 형식만으로 대추리 사태를 불러오는 일은 다소 곤란하단 뜻이다. 그럼에도 김미례 감독은 끝없이 역사의 생존자들을 찾아뵙고 이야기하며 1980년대 인천의 유지를 영화에 각인한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신사 아파트>의 논조를 농어촌특별전형이란 제도를 매개로 하여 극영화의 형식에 길어 온다. 수도권 중심주의적 시선에서 지역 생태계를 교란하는 어른들의 투기적 전횡을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로새긴다.
이쯤에서 다시, 영화는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났던 시간적 사건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심지어 그 사건이 우리의 주류 세계 바깥, 즉 어떠한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그 질문의 어려움은 더욱더 깊어진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공원에서>(2024)와 <지난 여름>(2023)은 차라리 특정되지 않는 한 공원과 한 시골의 풍광을 목격하며 그 공간들의 지역적 장소성을 소거하고야 만다. 달리 말해 영화의 시각적 구성단위인 시퀀스의 데쿠파주를 포기한다. <공원에서>는 무작위로 촬영하고 편집한 한 공원의 여러 면모를 교차로 지속하며 공간의 순수한 풍경만을 남기고 영화를 비-사건화한다. <지난 여름> 역시 몇 명의 인물, 몇 개의 이야기,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마을의 길들, 집 안의 방들, 무용한 대화들로 내러티브를 무화하며 벼가 흔들거리는 탈역사적 풍경만을 남긴다. 그렇게 두 작품은 영화에 침입하려 하는 더러운 현실의 틈입을 일부러 막으면서 영화의 역할론에 대한 복잡다단한 숙의를 일으킨다. 즉 올해 로컬투로컬은 영화 매체가 실제의 사건을 완연히 재현할 수 없단 한계를 드러내면서도, 이 한계들을 갖가지 아름다운 대안들로 변주하며 각자의 길을 찾은 이들의 일대기다.
영화는 어떠한 사건의 중심에 있더라도 그 사건에 개입하고 사건을 조작할 수 없다. 얼마 전 놀랍게도 ‘실제로’ 일어난 원주 아카데미 극장의 철거 과정과 시민들의 항거 과정을 그린 <무너지지 않는다>(2024)가 그러한 영화의 제약을 드러낸다. 원주시가 돌연 정책 기조를 바꾼 뒤 시민과의 숙의 없는 일방적인 행정 집행으로 60년의 시간이 담긴 원주 아카데미 극장을 부수려 한다. 시민들은 손을 잡고 반발한다. 하나 결국 우리의 현실이 주지하듯 그 건물은 사라진다. 사람들이 울부짖고 농성하더라도,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카메라가 찍고 있더라도 야속한 체제의 놀음 앞에서 극장은 없어진다. 그렇지만 극장의 소거에도 사라지지 않는 시민들의 솔직한 일상과 웃음은 충분히 영화를 지탱한다. 아카데미 친구들의 솔직한 고백과 일상과 웃음들은 영화라는 친구가 어쩌면 조금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우리가 힘을 모아 그를 지켜야 한다는 연대에의 필요를 되새긴다. 다소 뻔한 수사일지라도, 조금은 믿고 버티자는 것. 지역적 장소성의 구현, 사건의 재현과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영화 매체의 한계와 현실 세계의 차가움을 수용하면서도 함께 버티자는 6개 영화의 호기로운 이미지와 사운드들, 이것이 이번 로컬투로컬이 견지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선이다.
2024년 10월 24일 부산 미군 55보급창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24일 오후 6시 31분께 발생한 화재는 25일 오전 7시 24분께 초진 단계에 접어들었다. 불씨는 55보급창 내 냉동창고 시설에서, 배관 등에 관한 공사작업 중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화재가 발생했던 당일 증산공원 방향으로 이동하다 화재 소식을 접했고, 동구도서관 옥상으로 걸음을 옮겨 이 불길을 바라보았다.
올해 포럼 인디크라시 섹션을 소개하는 글을 대신하는 ‘불길을 바라보며 떠올린 몇 개의 단상과 메모’.
1. 불길을 바라보며, 꾸역꾸역 읽고 있던 『1945년 4월 8일 할버슈타트 공습』 (알렉산더 클루게 지음, 이호성 옮김, 문학과 지성사 펴냄)의 문장들이 쇄도했다. 그리고 이 섹션을 통해 소개하고자 했던 작품과 메모해두었던 표현 ‘유령들의 축척’을 떠올렸다.
2. 책의 후반부에 배치된 「토마스 콤브링크 주해」를 살펴보고 메모. “다큐멘터리 작업의 목표는 높은 핍진성을 획득하는 것, 즉 현실과 그것의 언어적, 사진적, 영화적 가공 사이에 직접적으로 접촉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획득하는 것이다”, “도시 위로 솟는 버섯 모양 연기”, “역사는 수많은 이야기로 쪼개져 흩어진다”, “사이에 놓인 것, 말해지지 않은 것, 형상화되지 않고, 형상화될 수 없는 것이 원래 이야기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3. 부산 미군 55보급창 화재에 대해 배포된 보도 자료 확인. “검은 연기가 일더니 화염 냄새인지 뭔지 냄새가 독한 냄새가 심하게 퍼져 창문을 닫았다”, “55보급창은 군사 보안시설이어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화재와 관련해 알려줄 수 있는 내용이 제한적”,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군수 물자를 보관하려고 조성된 55보급창은 해방 후 미군에 접수돼 부산항으로 반입되는 미군 장비를 전국 미군 부대로 보급하는 창고 역할을 해왔다”
4. 다시 「토마스 콤브링크 주해」 부분 펼침. “텍스트 한 조각에서 다른 조각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독자의 환상을 위한 자리가 생긴다”, “클루게는 적극적 독자를 명확히 요구한다”.
5. 읽고 나서 생각. 그리고 바꿔쓴 문장. “역사적 진술에서 또다른 진술로 넘어가는 사이에, 창작자의 환상을 위한 자리가 생긴다”. 클루게가 말했던 ‘적극적 독자’는 역사를 품고 읽는 이들, 환상을 만들어내는 창작자를 말하는 것인가. 창작자가 만들어낸 환상은 어떤 형상을 지니는가. 이 형상은 다시 역사로 편입될 수 있는가.
6. 소개되는 여섯 작품. 지난 10월 개최된 부산국제비디오아트페스티발을 통해 전시 된 <사념수>, <아그보그블로쉬에 관한 보고서>, <침묵 된, 침묵>, <특별한 물>, <릴리프, 릴리프>.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작 집단 ‘탁주 조합’이 기획한 프로젝트 「어떤 물길」에서 공개되었던 동명의 작품 <어떤 물길>. 이 여섯 작품은 역사에서 상실된 주체를 발견하기, 질병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생태학적 연관성을 되짚기, 폐기된 물질의 가능성을 추적하기, 회화 속에 저장된 풍경을 통해 숨겨진 역사의 증식을 드러내기, 액체의 정치적 생태를 통해 첨단 기술을 가능케 하는 국제주의의 이면을 들여다보기, 오염의 확산을 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폐허의 역사로 남게 될 현재를 그려보기와 같은 화법을 지니고 있다. 이 화법 속에는 식어가는 역사주의 앞에서 경직되어가는 현실을 지도위에 다시 그려내고자 하는 비사회적인 언어가 감지된다. 역사가 추방한 유령들이 새로운 축척을 손에 쥐고 나타나면 기록의 수장고로 추락했던 일그러진 진실이 고개를 든다.
7. 불길을 떠올리며, 다시 읽은 것. “불에 탄 것에서 나는 강력하고 조용한 냄새가 도시를 뒤덮고 있지만, 며칠이 지나면 익숙하게 느껴진다“, “텍스트가 무너진 곳 끄트머리들”.
2016년 6월 2일 부산 미군 55보급창 정문>(사진 오민욱)